소나기에도 지지않고
written by 고스틴(@go_steen)
반쯤 익은 석양은 모래와 닮았다. 푸석푸석하고, 물기라곤 없고, 손에 닿으면 금방 부서지는 게. 히나타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의 그 시간을 좋아했다. 뒤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의 짧은 인사를 웃어넘기며 움직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옆얼굴로 드는 그림자가 길어졌다 얇아진다. 정확히 열두시간의 시차가 나는 일본의 어느 수평선에선 지금쯤 물결을 찢고 위로 올라오는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요 빨리 와!”
리우의 해변은 낮의 열기가 식은 밤에 더 붉다. 떠드는 사람들과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몇 그램도 안 되는 공들에 적응하는 데에 1년은 넘치는 시간은 아닐지라도 모자라지는 않았다. 해의 숫자가 바뀌었다는 건 그만큼 책임지고 적응해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소리니까. 가끔 떠오르는 얼굴들을 생각하는 건 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매일 오후의 찰나면 족했다. 그래서 여름은 좀 곤란했다. 어느 나라든 여름의 해는 다른 때보다 끈질기니까. 완전히 질 때까지는 남보다 오래 버티고 오래 타오르고 그래서 남보다 오래…그립지 않으면 안됐으므로.
“쇼요 빨리 오라니까!”
짧지만 이 정도의 포르투갈어 대답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 게 언제였더라. 향수병에 두 번째 쯤 울었을 정도였나. 아르바이트 배달지를 네 번째 착각해서 결국 잘린 날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커다란 화면 속의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서브를 다시 봤던 때였을지도.
“금방 갈게!”
바지를 덮은 모래를 털고 경기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코트로 달린다. 내리쬐던 기세를 아직 알고 있다는 듯 밟아나가는 모래가 여전히 뜨끈했다.
“오늘도 맥주 내기?”
“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멀어진다. 해변에선 수많은 그림자가 모래 위에서 움직였다. 이 정도의 그림자라면 모래의 열은 금방 식을 것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와 함께 온도처럼 증발한다.
브라질에 오기까지는 맥주 맛같은 건 영 몰랐었는데, 그게 다 남이 사는 맥주 맛을 몰라서였을 거다. 닌자한테는 못 당하겠다며 거품이 넘치는 맥주 잔 두 개를 안고 오는 상대편을 볼 때가 얼마나 짜릿한지도.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니 탁자에 헤드폰을 목에 건 페드로가 미묘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쇼요. 부르는 룸메이트의 목소리가 영 별로다.
“왜?”
“전화. 엄청 왔어 너 씻을 때.”
“헉 미안.”
시끄러워서 도저히 볼 수가 없잖아. 애니메이션으로만 배웠다기엔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본어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전화를 건네주는 표정이 이젠 좀 불만스럽길래 조금 오버스럽게 미안하다고 어깨를 올렸다. 가끔 이렇게 만화처럼 굴면 좋아하던데. 이번에도 통했는 지 조금 표정이 풀려서는 다시 헤드폰을 쓴다. 어제까지는 원피스를 보는 것 같던데, 다시 재생되는 영상을 힐긋보니 공각기동대다. 물어보니 고전은 영원하다나 뭐라나.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이미 다른 세계에 빠진 룸메이트로부터는 대답이 나올 리 없으니 반쯤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군데군데 때가 탄 우유 팩같은 휴대폰 케이스를 열었다. 전화가 왔다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는 대신 몇 십개의 라인이 밀려있다. 라인 알림이 계속 울려서 전화인 줄 알았나보네…. 메시지 미리보기에 뜬 이름들은 대부분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배경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단체사진의 주인공들. 단 한명을 뺀 나머지 모두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
메시지를 눌러 확인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알림창 위로 뜬 하나의 속보알림. 일본 배구 뉴스란의 스마트폰 알림을 켜 놓은 사람은 온 리우를 다 뒤져봐도 쇼요밖에 없을 거라는 언젠가의 페드로의 말이 떠오른다. 심장이 손끝으로 옮겨갔는지 미끄러지며 놓칠 뻔한 전화를 겨우 두 손으로 바꿔 들었다.
“뭐라는 거야.”
문자 그대로의 말이었다. 뭐래 진짜…. 원래도 긴 글과는 친하지 않아 어떤 문장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은 처음이었다. 생애에 처음이었단 말을 써도 그다지 오버가 아닐 정도로. 바닥으로 떨어진 수건이 러그를 축축하게 적신다. 쇼요. 뒤에서 페드로의 말이 드문드문 들려온다.
[속보] 요괴신예 국가대표 세터 애들러스 ‘카게야마 토비오’ 부친상으로 전지훈련지에서 이른 귀국…
오늘 유독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생각해서 그런가. 배구기사를 아무리 찾아도 너를 나쁘게 말하는 기사가 없어서 괜히 야마구치한테 투덜거렸던 과거가 기억난다. 그 녀석, 실력만 좀 좋지 성격이나 말투는 정말 꽝인데. 그렇게 좋은 기사만 나올 녀석이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떠서는 얼른 만나서 붙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러지 말걸 그랬다.
-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가라앉은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두 번은 볼만한 게 못된다 싶을 정도로. 분향을 하고 스님께 인사한 뒤 마주 보고 선 얼굴이 소름 돋게 낯설어서 어울리지 않게 몇 마디 붙여보려던 의지가 죄다 사그라들었다. 옆에 서 있는 카게야마의 누나는 카라스노 졸업식 때 단 한 번 본게 전부였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약지의 반지보다 눈에 띈 건 남매가 하고있는 닮은 눈이었다.
“고생해라.”
“…어.”
덧붙이는 말없이 어깨를 한 번 쥐었다. 이 정도면 전해졌을 사이니 그 이상은 할 필요도, 그럴 권리도 없다. 그런 건 예전부터 진작에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걸 아니까.
“….”
이른 장마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쏟아지는 비에서 이는 물안개가 바닥에 내리깔린다. 그나마 조문객이 거의 돌아가고 없는 자정쯤이라 다행이었다. 궂은 날씨에 돌아가는 조문객이 걱정된다는 카게야마 부인의 헬쓱했던 얼굴이 잠깐 생각이 났다. 복도에 늘어선 조문 화환들은 척 보기에도 수가 많았다. 아버지가 중견 사업체의 대표라고 했었던가, 이제야 그 많은 수가 이해가 갔다.
비가 떨어지는 바깥 처마의 안쪽에 자리잡은 츠키의 곧은 손에 하얀 담배가 점멸한다. 축축한 날씨 때문인지 붙인 불이 희미했다. 옆에선 반 이상 줄어든 굵은 담배를 입에 문 남자들이 조심성 없이 떠드는 게 들렸다. 친척이었나, 아니면 카게야마 아버지 사업의 지인이라고 했었나. 기억이 희미했지만 옆에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만은 분명하다.
“이제 유명한 아들 덕 좀 보나 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나. 인생 참….”
“그러니까 교통사고가 무서운 거잖아요.”
“사업은 어떻게 한대? 뭐 이어받을만한 가족도 없는 거 같은데.”
“카게야마 부인이 전문경영인 찾는대요.”
나올 수야 있는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크게 할 얘기도 아닌 것 같은데. 흘끗 살펴본 쪽에선 음식접시를 전부 치웠는지 야치와 야마구치가 짐을 챙기는 게 보였다. 올라온 흰 연기가 빗속에 녹아 전부 사라진다. 남의 이야기가 그렇게나 재밌는 지 끊길 기세가 보이질 않았다. 츠키시마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썼다. 약한 두통이 들었다.
“사실 미와상이 제일 불쌍하지.”
“큰 딸 말이죠? 이번 주말에 결혼식이라던데. 어떡해….”
하늘도 무심하시지. 문장에 어울리는 건조한 말투로 누군가가 뱉은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닐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일이 아닌 일에는 그렇게까지 쉽게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츠키시마 자신조차 그랬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남의 일에 쉽게 공감하고, 끼어들고, 진심으로 울어주는 역할의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다.
“츠키 담배 좀 는 것 같은데.”
“그런가. 너 할래?”
“아니 난 끊는 중. 츠키도 좀 끊는 게 어때. 그래도 선수가.”
뒤따라 나온 야마구치가 결국엔 한소리를 한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 꿈쩍도 안한 츠키시마는 함께 나온 야치를 보고나서야 담배를 던져 껐다. 두 번째 붙인지 얼마 안 되어 반 이상 남아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럴 필요 없었다고 말하는 야치의 남색 우산에서 새어나온 물이 흐른다. 그 옆을 지나가는 발자국. 애들러스의 감독이었다.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츠키시마에겐 익숙한 얼굴이 무던한 표정으로 주차장을 향한다. 감독이 나오는 걸 보더니 급하게 담배를 끈 남자들이 우산을 펴고 그를 따랐다.
친척도 아니고 사업상 지인들도 아니었네. 완전한 헛다리에 츠키시마는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양복을 입는 직업이 아니다보니 이런 건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긴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할지도 모른다. 사람하나 남아 있지 않은 곳에는 희미한 향냄새가 빗소리에 흘러 섞였다. 누구하나 입을 열진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모두가 같았다. 정적을 깬 건 야치였다. 튕기던 손톱이 검은색 치맛자락을 무심코 잡는다.
“히나타는…역시 못 오는 걸까.”
“어제 다이치 선배랑 스가 선배 왔을 때 슬쩍 물어봤는데, 자기들도 말은 해놨다고 그러더라고. 읽었는진 모르겠지만.”
“올 수 있겠어? 갑자기 비행기 표 구하기도 어렵고, 그 녀석 유학 기간 동안은 안돌아올거라고 그랬다며.”
“그렇지….”
작게 웃은 야치는 다시 말이 없다. 아까 정신없이 음식 나르기를 도우면서도 휴대폰 만큼은 계속 확인하던 야마구치는 이제는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리라는 건 모두가 머릿속으론 알고 있었다. 원래 제일 힘든 건 머리로 깨달은 걸 현실로 직면하는 일이니까. 츠키시마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안쪽을 본다. 습기와 낮아진 온도 때문에 올라오는 하얀 입김이 꼭 담배연기와 닮아 보였다.
조의금을 정리한 미와의 약혼자가 카게야마의 어머니를 방에 데리고 가는게 보였다. 상을 정리하는 미와의 뒤편의 영정 앞에 홀로 우두커니 검은 등 하나가 서 있다. 꼿꼿하니 늘 재수 없기만 했던 저 등을 보고 설마하니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눈이 마주친 야마구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카게야마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어.”
“…심정은 이해가는데, 몸이 재산인 녀석이 그래도 되냐.”
“우리가 몇 번 권했는데 그때마다 됐다더라고.”
작아진 야치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아슬아슬하게 묻히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도 울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 되려 위태로워보인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처럼 아래로 침전하는 공기에 야마구치는 고개를 돌려 야치에게 말을 건다. 집 어떻게 갈 거야? 택시 불러줄까. 아냐 차 가져왔어. 그런 대화들이 츠키시마의 귀에서 점점 멀어진다. 두통 때문에 살짝 찌푸린 눈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츠키시마의 고갯짓에 야치와 야마구치가 차례로 고개를 돌린다.
언제 봐도 장례식장에 올법한 머리색은 아니네.
그런 생각을 하며 벽에 기댔던 등을 뗐다. 역할이 끝난 사람들은 빠져주는 게 예의다. 벽에 세워둔 우산을 펼친 츠키시마는 걸어오는 사람과 눈을 맞췄다. 살이 좀 탄 얼굴은 저멀리서부터 어색하게 웃고 있다. 장소 좀 가려서 웃어라. 면박을 줬지만 슬쩍 반가운 것도 사실이라서….
“됐다 가자. 제왕님 밥 먹일 사람 왔네.”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토비오는 스님이랑 얘기하느라 잠깐 밖에 나갔어.”
“아… 네.”
분향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히나타의 앞에 미와가 앉는다. 여름이라 생선이 상할까 싶어 내오지 않았다고 내려놓은 국이 따뜻하다.
“비행기 내리자마자 온 거지? 지쳤을텐데 먹어.”
“네 누님은 좀 쉬세요.”
지친 얼굴. 저 얼굴이랑 아주 닮은 얼굴도 저 모양일까 싶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로 마주치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소에서 아무것도 안 먹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엄마의 가르침이 생각나 수저를 드는 걸 미와가 말없이 지켜만 본다.
“쇼요 머리 계속 잘랐나보네.”
“예?…아, 뭐.”
“그 때 내가 마지막으로 잘라줬을 때랑 별로 안달라져서.”
“그냥….”
“….”
“누가 자르라고 한 게 자꾸 생각나서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런 게 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지. 주황색 머리가 여전히 눈이 부시게 밝아서 미와는 웃기게도 안심이 되어 조금 웃었다. 휘몰아치는 변화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여전해서. 살이 타고, 키가 조금 컸음에도 눈앞의 이 애는 여전했다.
‘오늘 머리 자를 녀석 하나 데려갈게.’
‘누구?’
그 간단한 물음에도 선뜻 대답을 못하던 토비오의 얼굴. 고등학교까지 졸업해서 어엿한 성인이 된 동생을 순식간에 애 같은 모습으로 돌려놓는 그 녀석이 참 궁금했었는데….
그릇에 다시 고개를 숙이는 히나타의 뒤로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의 동생이 보였다. 아주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지켜보고 있고 싶었지만 빠져야하는 때가 지금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없이 일어서는 미와의 모습에 당황한 듯 사레가 들린 히나타의 옆에 불쑥 물을 건네는 커다란 손이 나타난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받아마시고 고개를 들자 순식간에 사레가 뚝 끊겼다. 당황해서 밑도끝도 없이 붙잡은 팔이 어디 갈 생각 없다는 듯 천천히 내려와 옆에 앉는다.
“괜찮냐.”
그건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고. 입 밖으로 말할 뻔 했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다.
“응.”
“…조심 좀 해라 멍청아.”
이 멍청아 소리가 뭐라고 기분이 나아지는지 모르겠다. 눈이 마주쳤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원래도 서로 말이 많이 필요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무표정하게 핀잔을 주면서도 잡힌 팔은 온전히 내주고 있는 게 여전했다. 그 온도가 여전해서….
“너 밥 먹어.”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애들이 나보고 너 밥 먹이래.”
그래도 졸업식 이후로 2년만의 재회인데,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밥 먹으라는 소리일 줄이야. 잠깐 얼굴을 찡그리는데도 굴하지 않고 잡아다 앉혀 옆쪽에 남아있는 국을 들이밀었다. 이거 안 먹으면 나 안 간다. 변하지 않은 고집 역시 그대로라서.
“…알겠으니까 그럼 이거 좀 놔.”
카게야마는 그냥, 예전처럼 휘말려주기로 했다.
일회용 티백에서는 천천히 녹차가 우러났다. 엄마를 좀 보고 나와야겠다는 미와를 안쪽 방에 들여보낸 미와의 약혼자라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곤 밖으로 나왔다. 미지근하고 습한 공기가 뺨에 들러붙는 기분이 오랜만이었다. 리우의 날씨에 벌써 적응한 건지 쌀쌀해 얼른 녹차를 한 입 마셨다. 이런 건 예전엔 입에도 안 댔었는데, 지금은 그냥 이런 걸 마셔야할 것 같았다. 비가 멈춘 바깥 처마의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카게야마의 등은 꼿꼿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는지 곧은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힘없이 늘어진 몸이 무거워 보였다.
종이컵을 건네자 군말 없이 받아든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고 되짚었다.
“츠키시마 담배하더라, 빠져가지고. 지도 나름 배구선수면서.”
“…그거 하면 뭐 좋은가.”
“좋으니까 하겠지.”
“그런가.”
대답이 쓸쓸했다. 여상한 것 같아도 불쑥불쑥 그렇지 않은 순간이 오는 것까지 막을 재주는 없다. 오른손 엄지로 왼쪽 엄지를 반복해서 쓸어내리는 눈이 아까의 물안개에 푹 적셨다 나왔는지 탁했다. 그런걸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는 아직까지는 히나타에게 없었다.
“나는 배구만 해서. 그런 거 좋은가 잘 모르니까. 이런 때는 뭘 해야하는 지 잘 모르겠더라고. 카즈요 군때도 그렇고.”
“…담배 해봤자 목 아파서 더 힘들기나 하니까 생각도 하지 마.”
브라질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나, 늘지 않는 실력과 줄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때문에 모래에 다리가 푹푹 박혀 꼼짝도 못할 것 같았던 그런 날이 있었다. 페드로가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나간 독한 브라질 담배를 충동적으로 한 번 꺼내 물었다가 바로 뱉었다. 세상에 진짜로 그런 걸 왜 돈 주고 하는지 모르겠어서…. 힘없이 눌러 끈 담배가 오그라드는 걸 보며 처음으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게야마 만큼은, 이 녀석만큼은 그렇게 초라해지는 걸 보고싶지가 않다.
연기처럼 뱉는 숨이 끊기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얼굴을 보고 있길래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너 출국 언제냐.”
“이번 주만 있으려고. 오래 있어봤자, 뭐… 일요일 아침 비행기.”
대답을 듣더니 또 별말하지 않는다. 미와 결혼해 너 출국날. 별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래서 히나타 역시 의도없이 대답할 수가 있었다.
“들었어. 그래서 조의금에 조금 더 넣었어. 못 갈 것 같아서.”
남아달라는 둥, 비행기 시간 조금만 미루면 안 되냐는 둥.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쟤는 지금 뭘 많이 잃었고…. 그런 놈한테까지 매정하게 구는 건 꽤 힘든 일이니까.
“그러냐.”
그런데 고집스럽게 아무 말이 없다. 저쪽에서 의지가 없으니 이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가 그런 녀석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알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도, 알아줘야 했다. 하지 않는 말에 담긴 많은 말을.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급하게 귀국한 거라 사람들 만날 정신도 없고 그래서 집에만 있다가 갈 것 같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그 말은 덧붙이려다 생략했다. 여태까지 늘 뭘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될 때를 맞닥뜨리는 건 아직까지 어렵다. 어른이라는 건 그런 건지 여전히 잘 모르겠어서. 이쪽을 보는 걸 알면서도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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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다는 건 아닌데요 카게야마 군. 그래도 보통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라 이런 건 예의 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너는 예의 상 한 말 아니었잖아. 그럼 됐지.”
여전히 제멋대로인 제왕님이구만…. 적어도 출국 전날인 토요일 아침부터 카게야마의 집에 불려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다 제 착각이었나 싶다. 아니 나는 나름, 그때 빈소에서 비도 내렸겠다 감성에 젖어서 그정도로 청승 떨었으면 잘 끝냈다고 생각했다고…. 곧 죽어도 전할 일 없는 말이 안에서만 쌓여가서 히나타는 답답해 가슴을 좀 쳤다. 체했냐? 그 말에는 그냥 됐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쟤한테 약한 내 죄지.
뜬금없이 도와달라는 문자에 일단 오긴 했지만 내일의 신부는 자리에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다 온다는 것 같았다. 그럼 도와달라는 게 뭔데? 되묻자 어울리지도 않게 머뭇거리는 꼴이 웃겼다.
“입장….”
“입장?”
“어. 신부 입장.”
“그걸 니가 왜 연습해.”
“해달래. 미와가.”
“누님이?”
“내 손잡고 들어가고 싶대서. 카즈요군이 아빠한테 맡기고 간 일인데…못하게 됐으니까.”
이거 나한테 죄책감 느끼라는 거지.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올려다 본 얼굴은 의외로 담백했다. 진짜 그거 하나가 부탁의 끝이라는 것처럼. 뭐라 더 말을 할까하다가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여기서 동요하면 괜히 지는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지만 이 녀석한테 뭐든 다시는 지고 싶지가 않으니까 이정도 센 척은 필수이다.
“내가 뭐 하면 되는데.”
“미와가 딱…”
이정도 키거든. 머리위로 내려앉는 손이 오랜만이었다. 옛날에는 이 상태로 자주 조여져서 짜증을 냈었는데 이제 저도 어른이 됐다는 듯이 잠깐 머리칼을 흩트리고 내려가는 손이 담백했다. 너 좀 컸네, 키. 그러고는 웃는데 진짜 웃기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니가 뭔데 기뻐해. 진짜 재수없어.
“그냥 걸으면 돼?”
“어. 옆에 서서.”
아무래도 빨리 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침 비행기라 이미 짐은 다 정리해놨지만 짐정리도 하고 가족이랑 시간도 보내야할 것 같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머무는 건 위험했다. 하면 안 되는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요령없이 내미는 손에는 결국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로봇인가요 카게야마군? 그 말에는 시끄럽단 일갈이 날아온다. 그 흔한 행진곡 하나 없는 소박한 거실에서 오랜만에 그 손을 잡았다. 이 손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때가 있었다.
“….”
말없이 이어진 행진이 끝났다.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음데도 손을 잡은 채 걸어본 시간이 억겁과 같았다. 뭐든 처음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도 처음이라 그럴 것이라며 여러번 되뇌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온도가 손등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순간 리우의 일몰이 떠올랐다. 태양을 차마 놔주지 못해 그림자가 드리워져도 뜨거웠던 모래사장이.
“몇 번 더….”
걸을까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히나타의 손을 놓고 소파에 앉은 카게야마는 발인 전날밤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심장이 덜컥해서 그 앞으로 가니까 화상입은 것처럼 달아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야. 나오는 목소리가 푸석했다.
“너 이제 가….”
“무슨 이거 하나 했다고 가래.”
“됐으니까 이제 가. 내일 아침 비행기라며.”
“카게야마 군.”
“….”
“카게야마.”
“….”
“나 가지 말까?”
역시 오래 있으면 안됐다. 어떻게든 금요일 비행기를 잡아서 떠났어야 했다. 이렇게 될거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시치미를 뗄 생각도 전혀 없어서 그런 후회나 조금 했다. 얘가 무너지는 꼴을 내 눈앞에서 볼 때 이성적일 자신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어깨를 잡은 팔 안으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닿아온다. 나 가지말까? 응? 카게야마. 한 번 더 힘주어 하는 말에도 대답은 오래도록 없었다.
“…됐어 이제. 가도 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못한다는 건 참 쉬운 핑계였다. 평생 배구만 해서 그런지, 담배도 할 줄 모르고, 위로도 받을 줄 모르고, 하고싶은 말을 전하는 방법도 모르고, 누구를. 붙잡는 방법도 몰라서. 카게야마의 어깨에 놓인 손이 셔츠를 구겨잡는다. 전보다 넓어진 품 안으로 미세하게 파고든 머리에 손을 올렸다.
“넌 진짜…. 배구 빼고는 다 못한다.”
“….”
“이게 붙잡는 사람이 할 태도야? 바짓가랑이 잡고 울고불고 해도 모자랄판에.”
“너는 뭐 기대했는데.”
내가 너 잡길 바랬어? 가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기대하지 마. 그런 말 안해. 나 너 안잡아.”
“….”
“진짜 열 받는데, 근데…. 내가 잡는다고 잡히는 놈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했어.”
그니까 빨리 가버려. 보기 싫어.
우리는 왜 소중한 사람이 내일도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그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는데도. 어릴 적 상상한 누나의 결혼식에는 카즈요 군도, 아버지도 있었다. 그 어떤 결핍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듯이 견고하게 그렇게. 히나타는 이제야 제앞에서 처음으로 굽은 등에 조용히 말을 건다.
“…나 일년밖에 안남았거든 유학. 카게야마 군 각오하는 게 좋을 걸. 나 디게 세졌거든. 딱 일 년 뒤에 지금보다도 더 잘해져서 반드시 너 이기러 올 거니까.”
“….”
“진짜, 진짜로. 일년밖에 안남았으니까.”
진짜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를 계속 너의 미래에 둬. 평생 함께라는 근거 없는 상상 속에서도 당연하듯 계속 나타나게 해줘.
미와의 결혼식 당일은 날씨가 맑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흐렸었는데 날씨도 눈치를 보는 건지. 가족을 떠나보낸 날에는 지치지도 않고 내리던 비가 가족을 맞는 날에는 종적을 감췄다. 쨍쨍한 해가 쬐는 야외 결혼식에는 검은 옷과 검은 표정을 벗어던진 화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침통했던 그때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다들 웃는데도, 미와는 결국 조금 울었다. 그렇게 안 울겠다고 하더니 행진곡에 맞춰 손을 내민 동생을 보고는 결국엔 울었다. 울면서 행진을 했다. 한 번 뿐인 결혼식에 그러면 어떡해. 매형이 될 사람과 짧게 눈을 맞추고 미와의 둥그런 팔을 한 번 잡았다 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나 울고 있는 엄마의 옆에 앉아 카게야마는 결혼 서약을 읽는 미와의 뒷모습을 본다.
“이상으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신랑과 신부의 뒤로 파란색의 하늘에 상처처럼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다. 행복해보이는 누나의 얼굴 뒤로 끝도 없이 올라가는 비행기에 카게야마는 시선을 빼앗겼다. 저 비행기에 있으려나. 아침이라고 했으니 이보다 더 이른 비행기였을 수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너는 어디든 너무 잘 날아다녀서 그게 참. 문제니까.
이제 겨우 일 년 남았다고 했나. 터지는 꽃잎의 폭죽과 환호하는 사람들을 따라 일어나 박수를 치며 그런 생각을 했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널 이기는 건 반드시 나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원을 말했다. 카즈요 군의 영정 앞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조금씩 잃기 시작한 내 영원을 다시 주워다가 내민 게 하필이면 너라서. 나는 그 선언같은 확언을 전보다 넓어진 그 녀석의 품에 안겨서 수용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확신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연락을 끊어도 도저히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계시겠구나. 신병을 받아들이는 무당처럼 카게야마는 그에 내려진 운명을 다시 마주한다. 소나기같은 이별에도 결국 지지 않은 여름의 성혼의 순간에.
히나타 소요가 생각하는 영원이라면 답 역시 그 생각대로일 테니.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