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으시기 전, 작품 속 등장하는 인물이 하이큐 원작과는 다른 캐릭터 성향을 띌 수 있습니다.

 

 

 

 

Call me by your name

 

written by 우주(@spaceinhq)

 

 

 

“나, 차라리 카게야마랑 결혼할래.”

 

저 혼자서만 분주히 움직이기 바빴던 카게야마가 그 말에 조소를 흘렸다. 언제나처럼 메어지는 나비넥타이가 행여 불편하지는 않을까. 그런 마음에 제게로 들이 밀어진 목 아래로 조심스러운 손길을 행한 후에서야 입술을 떼어냈다.

 

“저는 이미 도련님의 것이잖아요.”

 

히나타 쇼요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거짓말 마. 넌 우리 아빠 거면서."

“지금 제가 모시는 건 도련님이에요.”

“흥. 딱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거.”

 

의자에 앉아 새초롬하게 굴던 히나타가 얼굴을 휙 돌렸다. 이제는 대충 히나타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카게야마는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 좋은 말이었구나. 다행이군. 자주 해줘야겠어. 이렇듯 제가 모시는 도련님은 저보다도 어려서인 것도 한 몫 하겠지만, 표현은 항상 정 반대였다. 서투르고 낯설어서 하지 못하는 카게야마 토비오와는 달랐다.

 

뾰루퉁해진 입술을 하고서 옆으로 젖혀진 고개를 따라 시선을 움직여가던 카게야마는 작은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얗디하얀 셔츠 위로 안착한 먼지를 쫓아내기 위함이었는데, 움찔. 히나타의 몸이 떨렸다. 누가 보면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알겠네. 어쩔 수 없는 한숨이 대신 그 위로 안착한다.

 

“도련님, 이제 아가씨가 올 시간입니다.”

“진짜?”

 

튀용. 저 모르게 의자에 스프링이라도 설치를 해둔 것 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히나타 가의 장남이 있다. 카게야마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리지도 않는다. 이유를 대라 함은 대겠으나, 그것은 단연코 도련님 쪽에서 명령하는 전제 하에 행하리라.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무섭게 히나타 쇼요가 외쳤다.

 

“카게야마, 눈 감아!”

 

저의 한 쪽 무릎은 바닥에 기댄 채, 빳빳하게 솟아오른 두 다리 중 하나의 신발 끈에 손을 뻗은 참이던 카게야마가 말대꾸를 했다.

 

“도련님의 신발 끈이 풀려 있는데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얼른!”

“정말요?”

 

되물어보아선 아니 되었다는 식으로. 작디작은 체구로 신발 끈 묶는 것을 방해하던 히나타가 제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한참이나 작아서 작은 손으로 눈을 가리려 해도 참 엉망이었다.

 

“진짜라니까? 너, 내 말 못 믿는 건 아니지?”

 

틈새로 동그란 눈을 한 히나타가 종용했다.

 

“그럴 리가요.”

 

카게야마 토비오는 작은 손 위로 하얗디하얀 장갑을 낀 제 손을 포개며 말한다. 한 손으로도 전부를 포갤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듦과 동시에 따스한 온도가 보다 더 잘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센치해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당신의 사람이니, 당신만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만 있다는 걸. 도대체 언제쯤 알아 봐 줄까.

 

“자, 이제 숫자 세.”

“도련님.”

 

눈꺼풀을 감아 내린 너머로 살포시 감싸 쥔 손이 한 줌 떠나가는 걸 느끼자, 그것이 아쉬웠던 카게야마가 돌연 히나타를 불러 세웠다.

응? 하고 터진 물음이 금세 등 뒤에서 들리는 걸로 보아, 우다다 달려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 간드러진 발소리를 놓친 건 조금 아쉽다. 하도 뛰어다녀서 큼지막한 보풀의 카펫을 보다 나중에 깔아버릴 걸 그랬나. 갸우뚱 옆으로 젖혀진 고개를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한층 떨려왔다.

카게야마가 말했다.

 

“이번엔 힌트라도 좀 주세요.”

“싫어! 넌 그 애한테 말할 거잖아?”

 

타닥. 그렇게 말을 뱉어놓고 복도께로 발을 옮겨 낸 히나타 쇼요가 참 밉다고 생각했다. 싫다는 말에 움찔거리면서 반응하는 저의 몸뚱어리도 싫었고, 하마터면 너한테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냐면서 따질 뻔도 했다. 다시 눈꺼풀을 감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눈을 감는다는 건 인내심을 기르는 것과도 같았다. 이는 이 저택에 오면서부터 정한 본인만의 룰이었다. 그리하면 전부 쓴 소리 끝에는 평범한 말꼬리로 대화를 매듭지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히나타 쇼요를 떠올릴 수 있다.

 

천방지축 도련님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가장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고, 두 번째로는 도련님은 그 결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주인께서는 어떡해서도 이 결혼을 성사시키고파 하지만, 나는 뚜렷히 반대의 의사를 가진 도련님을 모시는 집사다. 굽힌 무릎을 피어 올린 카게야마가 바람에 펄럭거리는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한낱 집사일 것이다. 어딜 가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도련님을 따라서, 안 좋은 의미로다가 오르내리는 이 집안의 고용인.

 

“싫다.”

 

그건 카게야마가 담백하게 뱉어낸 말이었다. 왜인지는 까닭을 알 순 없다. 그냥 흘러나온 말이려니 했고, 지나가는 메이드들도 얼핏 듣기론 한껏 엉망이 된 방 상태에 대한 한탄이라 여길 것이다. 물론 카게야마는 그걸 노리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리 쉬쉬할 것이다. 도련님이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또한 당연한 수식어인 것처럼.

 

흐드러진 침대보. 물결을 피해 이따금 기다란 저의 손으로 몇 번 쳐내어주면 그것은 곧잘 매끄러워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베개와 나츠 아가씨가 주신 것 같은 아기자기한 인형들. 자칫 구두를 신은 저의 발에 걸려 먼지라도 묻어버릴까, 괜히 조심스러워진 카게야마가 무릇 사자 모양의 인형을 잡아들어 올렸을 때였다.

 

“어어, 오빠?”

 

빼꼼. 고개를 불쑥 내민 나츠 아가씨의 목소리에 카게야마 토비오가 찬찬히 고개를 방 입구로 던졌다.

 

“아가씨.”

“오빠는 어디 있어요?”

“글쎄요.”

 

뿌우—. 도련님이 시야에 사라질 때마다 항상 애매하게 내놓던 버릇이 있어서, 카게야마가 늘 사와무라 씨에게 그랬듯 답하니 양 볼을 가득 부풀린 나츠가 심술을 부렸다. 토비오는 대체 아는 게 뭐야? 누구 동생 아니랄까봐, 그렇게 들려오는 표정으로 바라 봤자…….

 

하아.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내려놓은 카게야마가 입술을 재차 움직였다.

 

“아가씨,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으응? 하고 금새 활짝 피어오르는 표정을 보노라면, 정말 히나타 쇼요의 판박이라고. 그래서 도련님 다음으로 제가 약한 상대인 걸까? 손에 들고 있던 사자 인형을 나츠 아가씨에게 전달한 카게야마는 작은 아가씨의 눈높이에 맞추어 저의 기다란 몸뚱어리를 움푹 낮추었다.

 

“도련님이 또 술래잡기 하신다며 사라지셨는데, 지난번에는 아가씨가 찾아주셨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는 뒷말까지는 필요없는 모양이었다. 제 손을 깜찍하게 잡아 이끄는 소녀의 힘에 못 이긴 척 움직이면 되었으니까.

 

동시에 카게야마의 머리칼이 점점 살랑거리며 공기 중을 가로 질렀다.

 

 

 *  *  *

 

 

결국 나츠 아가씨의 손길에 이끌려 저택 곳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스가와라 씨 덕분에 벗어났던 참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손목시계를 훔쳐봤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나 싶어 절로 혀를 찼다. 오후 네 시가 훌쩍 넘은 이 시각은 평소라면 도련님의 티타임이 시작되고도 남았을 텐데.

 

급해진 카게야마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주인께서 즐겨 쓰시는 다과 실이었다. 서둘러 홍차를 집고, 그것과 곁들여 먹을 쿠키 종류를 대충 집었다. 쿵쿵. 연이어서 급한 마음에 조신한 발소리를 겉으로 신경 쓸 틈이 없던 카게야마는 어느새 혼잣말을 중얼이고 있었다. 도련님은 홍차, 도련님은 홍차, 홍차에 쿠키. 첫 날부터 제 취향을 읊어대던 도련님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일 것이다.

 

“—글쎄, 오늘 도련님이 히토카 아가씨를 웬일로 마다하지 않으셨대?”

 

커브 하나만 돌면, 바로 도련님의 방이었다.

 

그것을 알고 제 몸뚱이를 기울였던 카게야마가 불현듯 제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도련님이 히토카 아가씨를 만나셨다고? 이번엔 다른 말이 아스라히 입 밖으로 쏟아졌다.

 

“너 소문 못 들었어? 도련님, 계속 숨어버리니까 카게야마 씨가 싫다고 하셨나 봐.”

“카게야마 씨가 그렇게 대놓고 얘기했대?”

“나야 모르지.”

“엑, 싫다~. 도련님은 카게야마 씨만 좋아한다니?”

 

깔깔깔. 당연하리만치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카게야마는 그저 두 눈을 꿈뻑거릴 뿐이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괜히 어깨도 한 번 들썩거렸다. 그리곤 잇따라 한숨이 폭 퍼진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도련님이군. 안 봐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 갔을련지 뻔했다.

 

히나타 쇼요라면 분명 본인이 직접 이야기 했을 것이다.

히나타 나츠의 손에 이끌린 척 했지만, 실은 전부 카게야마 제가 유도하여 살펴 본 방들과 정원 속에도 없었던 게 그렇다면 말이 된다. 아가씨와 마주치지 않았던 것도, 복도를 거닐던 발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던 것도.

 

약간 어수룩하게 닫혀 있던 옷장 문을 괘념치 않고 지나쳤던 제 모양새를 보면서, 도련님은 가히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싫다고 말한 것이 도련님에게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래서 그토록 싫어하시던 히토카 아가씨를 만나셨나요?

 

그런 물음이 담긴 침묵을 가지고서 방문을 열어젖힌 카게야마는 뻥 뚫린 커다란 창문틀에 내리 앉은 소년을 제 시야에 담았다. 말주변도 없고, 배려심과도 거리가 멀었던 제가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저 소년 덕분이다.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입만 열면 떽떽거리면서 자기는 도련님이라 하기 바쁜 철부지 하나와 모든 것을 잃고 겨우 삶을 연명하기 시작한 외톨이 하나. 거기다 저 사람은 뭔데 이 집으로 오자마자 도련님을 모시냐며, 앞뒤 가리지 않고 수근대는 소리들을 애써 삼키고서 무표정하게 있던 날들이 많았던 카게야마 토비오. 정말 극과 극으로 맞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근데 넌 왜 안 웃어?”

“예?”

“웃어 봐, 이렇게!”

 

재미있지 않아? 만화 영화를 보다 말고 제 얼굴께로 손을 뻗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내는 행위를 하던 소년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히익! 잇따라 소스라치게 놀란 몸뚱이가 제 몸집보다 훨배 큰 의자 속에 숨어들었다. 카게야마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웃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입꼬리를 올려 봤자 인상이 더욱 험악해질 수밖에.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제 입으로 말하진 않았다. 우스갯소리라도 내뱉을 만큼의 서글한 성격도 되지 못한다.

 

그 다음부터는 저더러 웃어보라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 그 녀석은 진짜 재미없어.”

 

그리곤 저의 여동생에게 이상한 말꼬를 트는 것을 들어 버렸다. 커다란 저택 안에서도 이렇게 엿듣는 것이 가능할 줄이야. 그것도 집과 집을 잇는 1층에서. 정원으로도 갈 수 있게 뻥 뚫려도 있구만. 괜히 시답잖은 생각까지 하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러대던 카게야마는 들고 있던 시트를 세게 움켜잡았다. 너라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주고, 다르게 바라봐주지 않을까—했던 일말의 희망조차도 깨어진 기분이 들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두 눈을 감았다.

애초에 이러한 생각도 들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저를 무작정 데려 와 고용하겠다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지, 당신의 아들을 보필하는 주제에 친구라는 연대 감정을 품지 말라곤 안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품으라고도 하지 않았어. 이는 카게야마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것이지만, 책임은 또 제가 해야만 한다. 정말 모순이지 않은가?

 

“뭐야, 카게야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윽. 잘 숨었다고 생각했거늘. 싫은 소리를 내버린 카게야마가 기나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남색 눈동자를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뒷짐을 쥐고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기둥을 등지고 있던 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젖혔다.

 

그리고 뜬금없는 소릴 한다.

 

“너도 일 하기 싫어?”

“뭣…….”

“잘 됐다. 이거 버리면 할 일 없어지는 거지? 그럼 네가 술래 해!”

 

저보다 큰 시트를 빠른 속도로 확 낚아채더니, 저만치 복도께로 던져놓은 히나타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술래? 뜬금없이 터지는 말에 심각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한 카게야마는 소년의 말을 따라하고 말았다. 방금 전의 제 본분은 시트 정리라는 것도 깜빡 잊은 채로.

 

그랬더니 정원 쪽으로 사라지는 것 같던 소년의 여동생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모양이라, 뒤늦게 헉. 숨을 삼켰던 카게야마가 부랴부랴 시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낯서면서도 어렴풋 들은 기억이 있는 여자 목소리까지 들려온 탓에 강아지 마냥 온몸을 떨던 히나타 쇼요가 제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늦었어! 나랑 같이 숨자, 카게야마.”

“…….”

“술래가 오고 있단 말야!”

 

아, 아, 어디에 숨지! 덥석 손을 잡고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만 바쁘던 히나타를 보곤, 상황파악은 다 못 했지만 개중 가까운 풀숲 속으로 먼저 몸을 던진 카게야마의 무력에 소년의 몸뚱어리 역시 끌려왔다. 제 품으로 껴안긴 듯한 모양새가 된 히나타가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고 소리를 내자, 바깥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쉿. 제 검지를 소년의 입술 위로 갖다 대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크게 띄운 두 눈을 껌뻑거리기 바쁘던 히나타의 숨이 덩달아 삼켜졌다. 그리곤 조용히 저의 입을 막은 손가닥을 따라 위로 올라 간 시야의 끝에는 푸르런 색을 띄는 머리칼과, 그 뒤로 뻗어 연리지 모양을 한 나무가 있다.

 

“오빠?”

 

나츠 아가씨, 맞지. 조심스럽게 중얼거린 카게야마의 눈살이 좁혀졌다. 아낀다고 했던 것 같은 사자 인형을 한 쪽 손으로 안아 든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좀 전의 소년을 빼다 박았다. 그리고 풀숲 틈으로 그려지는 금발 머리의 소녀. 카게야마도 보자마자 알 것 같았다. 저 소녀가 소년의 정혼자…….

 

아, 그럼 내가 이 아이를 숨겨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주인께서는 이 결혼을 꼭 성사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분명, 사와무라 씨가.

 

무릇 생각이 많아져 느슨해지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팔이 무의식중으로 유일한 시야를 비추는 풀숲 틈을 가르려고 할 때, 히나타 쇼요가 재차 그 팔을 잡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젓고 있었다. 소년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입술이 움직였다.

 

“……안 나가면 혼나는 데도?”

 

제 말에 움찔 떨리는 몸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진 탓에 카게야마는 구태여 코를 훌쩍거렸다. 꼼지락거리는 몸뚱어리가 의식 될 때마다 이상한 것이다. 분명 재미없다고 했는데, 왜 이리도 몸은 저릿한 가슴팍과는 다르게 움직여댔는지 모른다.

솔직히 카게야마는 그것을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시트를 어지러이 복도께로 던져 놓은 짓 때문에?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해도 모자를 판국에 소년의 보이콧에 동참한 탓에? 이러한 생각들만 드는 걸 보니, 아무렴 제 자신에게 묻는 말인 듯싶다.

 

겨우 정원을 벗어난 인영들의 발소리도 들리질 않자, 그제야 벗어나온 카게야마의 품에서 히나타가 유난히도 난리를 쳤다. 얼른 풀어 줘! 대충 그런 소리를 내며 저와 떨어지더니, 그래도 확인하려는 듯이 두 집을 잇는 복도를 번갈아가면서 확인한다. 휴우.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쉰 소년이 그러한 절차 다음으로 저를 향해 뒤를 돈다.

 

푸핫! 그러다 자기 혼자 빵 터지며 대뜸 물었다.

 

“카게야마! 너 얼굴이 왜 그래?”

 

이번에는 저에게로 길게 뻗어지는 검지를 물그러미 바라보던 카게야마 토비오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젖혀졌다. 감도 못 잡는 제게 힌트라도 주려는 듯이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들로 휘감아내던 히나타를 그제야 따라하던 카게야마는 여전히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제법 가까이 붙어 있던 나뭇가지에 머리를 계속 움직여서 인가?

 

손등으로 코 끝을 슥 닦아낸 카게야마가 찌푸린 표정을 그렸다. 거무튀튀한 것이 고스란히 찍혀 나온 것 때문인데, 이러한 저의 행동에 힐끔 들어 올린 시선 속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이름따라 태양처럼 웃고 있는 소년. 결국 자기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트린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재미없는 사람이 맞다. 그러니 당신의 말에 수긍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사실 나도 들었어.”

 

문득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히나타가 말했다.

 

“메이드들이 하는 말들 있잖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십쇼.”

 

답지 않게 모깃소리로 말한 카게야마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머쓱했기 때문이다. 해서 쓸어내린 목덜미 부근이 간지러운 건, 내리 쬐는 태양 때문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

 

소년은 순진무구한 물음을 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문이 망해서, 혼자가 되어버린 이 바닥에서, 우연히 주인께 눈에 띄어 이 저택에 발이 닿았더라고. 정말 짧게 요약해선 그런 말들이 저택 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처럼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쯤은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평소엔 눈치가 더럽게 없던 제가 알 정도라면 말도 다 했지.

 

목 부근으로 갖다 대었던 손을 허리 아래로 떨어뜨린 카게야마 토비오가 다시금 주황빛 머리칼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 입술이 움직인다.

 

“카게야마, 넌 재미없어.”

“…….”

“그치만 흥미는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하물며 자길 데려온 주인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는데, 작디작은 소년이 괜찮냐고 한 사실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해서 너무나도 개운한 얼굴로 웃음을 띄운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때 결심했다.

 

주인께서 날 데려 왔더라도, 이제부터 난 도련님.

그러니까 히나타 쇼요, 당신만을 위해 헌신하리라.

 

“도련님, 혹시 아프십니까?”

 

카게야마는 구태여 그리 물었다. 부우—.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좀 전의 나츠 아가씨가 취한 태도마냥 볼을 부풀리는 도련님의 얼굴을 보자니 한숨이 터졌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몸을 파릇 떠는 것을 보곤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카게야마가 결국 히나타 쇼요의 볼을 한 손으로 꾸욱 움켜잡았다.

 

우웅! 아마도 싫다는 뜻으로 의사를 표한 것이겠지만, 그건 흘려듣곤 제 말만 하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히토카 아가씨를 만나셨다고요. 무슨 바람이 부셨습니까?”

“…이미 다 알면서, 왜 묻는 건데?”

 

양 손으로 힘 써가면서까지 저의 손을 떼어낸 히나타가 불퉁한 얼굴로 반문한다. 그러게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힘없이 뒷말을 메꾼 카게야마는 그제서야 홍차를 담은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리 테이블 위로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청량하게 퍼졌다. 잇따라 정적을 견디기 힘든 아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결국 저의 허리가 곧게 피어오르는 순간에 소음이 퍼졌다.

 

“언제 들으셨습니까?”

 

다시금 그리 묻는 카게야마는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복도로 도망쳤으면서 나츠 아가씨가 도련님을 보지 못한 것도, 어색하게 열리어 있던 옷장 문이 조금은 신경 쓰였던 것도. 히나타 쇼요 역시 알고 있었던 거다. 도망치기 바쁜 히나타가 자신의 방에는 숨지 않는 것도, 집사가 당연히 그것조차 꿰뚫었기 때문에 오히려 방을 찾지 않았다는 것도.

 

하지만 타인은 가장 먼저 도련님의 방을 먼저 확인하다는 것까지는 생각치도 못했겠지.

 

“저는 도련님이 싫지 않습니다.”

 

양쪽 문이 활짝 열리어진 상태의 옷장을 힐끔 바라 본 카게야마가 눈꺼풀을 내리 떴다. 아. 탄식에 가까운 감탄이 이따금 터졌다. 또다. 동그랗게 커져가는 동공과 그 속에 담기어지는 제 인영의 그림자. 카게야마는 그것이 좋았다. 뭐든지 저를 궁금해 하는 것이 좋았고, 제 말을 처음 듣는 것 마냥 구는 것도 좋다.

 

그랬더니 며칠 전, 별안간 복도에서 마주쳤던 야치 가의 아가씨가 떠올라 버린다.

 

“저기…….”

 

윽. 싫은 소리를 낸 카게야마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다. 왜냐하면 제가 모시는 도련님이 질색하는 약혼자이기 때문이렸다. 물론 이유는 몰랐다. 구차하게 물어가면서까지 알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도망치고 숨기 바쁜 히나타를 쫓아다니는 모양새를 몇 번이고 들킨 것도 한몫했다.

 

구태여 길을 막은 것처럼 보이는 소녀가 시선을 어디로에 둘지 모른다는 듯이 안절부절 하다, 한 템포 늦게서야 저의 시선과 교차했다. 작은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

 

“쇼요…, 군이 나를 만나주지 않아요.”

 

자기 가슴께로 얹는 소녀의 두 손이 포개어지는 것을 물그러미 내려다보던 카게야마는 순수한 의문이 서렸다.

 

“아가씨는 도련님을 사랑하십니까?”

 

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다시 제 주변으로 흩어지는 시선과 함께 들이 밀어지는 종잇조각이 하나. 이것이 무어냐고 눈짓으로 묻는 카게야마의 행동에 답을 주듯이, 찰나에로 부딪친 시선은 이리 말하고 있다.

 

“그 답은 쪽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

“그러니 카게야마 씨, 저를 대신해서 한 번 물어 봐주실 수 있나요? 부탁이에요!”

 

집 잘 사는 아가씨가 한낱 집사에게, 딱 보아도 빼곡히 적힌 종잇조각을 들이 밀면서 90도로 허리를 숙여대는 게 맞나. 때 아닌 돌발 행동에 당황한 카게야마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고 말았다. 감사하다며 활짝 웃는 야치 히토카의 얼굴을 보자니, 약간 뻘쭘하기도 하면서 감정이 이상하게 애달펐다.

 

파아란 별 모양의 머리 끈으로 금발을 엮어 낸 소녀의 입이 재차 벙그린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카게야마 씨.”

 

아가씨는 또 한낱 집사에게로 헤프게 허릴 굽히며 등을 보인다. 멍하니 바라보았던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저 소녀는 틀림없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하는 매력이 있다고. 그것이 필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나타 쇼요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이상기후에 쉬이 눈치 채지 못했을 텐데.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런 본인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조금 전에도 당당하게 도련님이 싫지 않다고 말한 것이니까.

 

작게 숨을 들이 킨 카게야마가 무릇 물었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왜 히토카 아가씨를 싫어하십니까?”

 

으. 홍차를 마시던 히나타가 제 말에 싫은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터무니없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싫어한대? 아니거든?”

“그럼 왜 피하십니까?”

 

카게야마는 저의 물음에 히나타 쇼요가 부정한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서 저도 모르게 눈썹이 파릇 떨리며 좁혀지고, 냅킨을 집어든 손에 힘이 꽈악 설린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도련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버지가 멋대로 정하신 거잖아. 근데 야치 씨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난 그게 미안해서 그래.”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왜 맨날 번거롭게 우리 집으로 오는데?”

“글쎄요.”

 

창밖으로 넘기는 시선을 따라 뒷줌으로 손을 움직여 낸 카게야마 토비오가 대답을 회피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다. 소녀, 그러니까 히토카 아가씨의 쪽지를 뒤로 숨기곤 구겨버린 때가. 정갈한 필기체로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쓰여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나, 히나타 군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첫 문장부터 낯간지러운 쇼요 군—이 아닌, 히나타 군이라고. 어째선지 선을 긋는 말투로 시작되어 있어서,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둘,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히나타 군은 아닙니다.」

「셋, 히나타 군만 괜찮다면 이 약혼은 없던 일로 하고 싶어요.」

「넷,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항상 찾아다녔지만, 얼굴 한 번 보여주질 않네요.」

「다섯, 우리는 서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카게야마 군.」

 

그렇게 마지막 줄을 읽어 내리자마자, 카게야마는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홀딱 벗은 채로 대 저택을 활보하는 느낌처럼. 왜, 갑자기 거기서 내가 나올련지.

 

아아. 어쩌면 히토카 아가씨는 도련님을 구실로 저의 감정을 깨닫게 해주려던 것일까.

 

“카게야마, 난 차라리 너랑 결혼하고 싶다니까!”

 

그때 또 퉁명스런 소리로 얄미운 장난을 말하는 주황머리 도련님이 있다. 꾹 눌러오는 가슴을 움켜잡은 카게야마는 의자에 앉아 방을 동동 구르는 히나타를 내려다보았다. 저것에 술렁이던 마음이 뫼시는 주인님, 그 이상인 것도 여태 몰랐던 게 말이 될까? 그래서 그때에 히토카 아가씨가 가슴 위로 제 손을 얹었던가?

 

오전과 똑같이 도련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제 턱을 살짝 위로 치켜 든 자세를 취한 카게야마 토비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분부대로 도련님을 제가 납치해도 됩니까?”

“…뭐?”

 

한 박자 늦은 반응을 보이면서 몸을 흠칫 떨어버린 히나타 쇼요가, 자신의 두 무릎을 끌어 당겼다. 이는 자신이 어딘가 불리할 때마다 취하는 행동이었다. 덕분에 바닥에서 떨어진 두 발은 크디 큰 의자에 제 몸뚱이와 함께 폭 담겨져 안심을 주지만, 언제나 아침마다 신발의 매듭을 엮어주던 것처럼 올려다보는 남색 눈동자는 참 낯설었다.

 

해서 아직까지도 풀어 헤쳐진 상태의 신발 끈의 여지처럼, 되물었다.

 

“카게야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이곳과 맞지 않는 사람이니, 도련님과 결혼하려면 이곳을 나가야 하는 게 맞습니다.”

 

언제나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나를 보고 있노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창밖의 푸르럼을 좇던 네 시선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유를 잃은 네가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언젠간 이 내 손으로 네게 자유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손이 먼저 뻗어 네 옷깃을 붙잡았다. 하얀 셔츠가 물결을 일면서 구겨진다.

 

“……넌 항상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워.”

 

꾸욱. 입술을 깨물던 히나타가 말했다.

 

“사라지던 쪽은 도련님이셨습니다만.”

“됐거든? 그런 정략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서 납치해주겠다고, 지금 말하잖아.”

 

더욱 세게 옷깃을 움켜 쥔 저의 손 위로, 보다 큼지막한 손이 겹쳤다. 동시에 아래로 떨어졌던 제 턱 끝을 부드러이 들어 올리는 손짓도 있다. 새하얗지만, 안의 속살이 비추는 얇은 장갑을 끼고 있던 카게야마였다.

 

그런 손이 제 턱을 들고, 단숨에 좁혀진 거리감에 이마를 콩 부딪치노라면 나는 숨을 멈춘다.

 

봐, 이러면 헷갈린다고…….

 

어딘가 아린 것처럼 한쪽 눈을 찡그린 히나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입술을 벌린 채로 있던 카게야마는 단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무의식중에 감춰두었을 열망과 욕망이 들끓기 시작하더니, 무방비한 히나타 쇼요의 순정을 빼앗아버리고픈 생각까지 치몄다.

 

「우리는 서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카게야마 씨.」

 

행복, 이라. 불현듯 히토카 아가씨의 쪽지가 생각이 나,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눈꺼풀을 재차 내리 떴다. 그리곤 가장 붉게 물든 입술을 시야에 가두며 말을 이었다.

 

“쇼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

“순전히 그녀가 가여워서 피해 다니는 겁니까?”

 

이따금 카게야마 토비오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은 기분이 묘해서, 사실 뺨이 볼그스름 타오름과 동시에 뜨거워지기까지 해서. 그럼에도 언제나 나는 그늘 진 곳에 숨기 바빠서 숨겨지고 있었는데—아직도 이리 훤한 낮에, 그것도 커튼마저도 살랑대는 바람결이 제 이마를 톡톡 노린 탓에.

 

히나타 쇼요의 얼굴은 고스란히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 그렇다고 해, 했잖아!”

 

찬찬히 동공이 커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가까워졌던 거리를 피하고자 고개를 휙 돌린 히나타가 결국 말을 더듬었다. 젠장, 다 들켰어. 속으로 그 말까지 씹어 삼켰다.

 

히토카를 핑계로 숨어 다닌 건 맞지만, 사실 카게야마 네가 온 다음부터는 구태여 더 숨어 다녔다. 모든 사람들이 날 잡기 위해 안달이 나 있을 때, 너만이 나를 품에 가두어 숨겨주었으니까.

 

그날 콩닥콩닥 뛰어대던 심장 소리는 틀림없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또래가 왔고, 또래인 자가 저와 쿵짝이 잘 맞았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히나타는 어느샌가 녀석에게 이따금 마음을 주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이 다른 사람과 맺어지는 건 싫습니다.”

 

콩. 이런 건 낯간지러워서 온몸으로 거부하던 찰나, 이젠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또 거리를 좁혀 온 카게야마 녀석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낮게 잠긴다.

 

“그러니 조용히 나에게 납치당해 주세요, 도련님.”

“……카게야마.”

“응.”

 

어느덧 저를 원한다는 것처럼 제 목에 팔을 걸어내고 있음을 과연 인지하고 있을까? 괜히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가, 저의 이름을 부른 게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하얀 장갑을 낀 카게야마의 손이 아주 찬찬히 그 팔 위를 걷기 시작하다, 이윽고 허리 아래로 떨어져 몸을 더욱이 밀착시키고야 만다.

 

“그게 아냐.”

 

비좁은 틈에서 몸을 틀어내려던 히나타 쇼요가 열기를 띈 목소리로 부정 아닌 부정을 한다. 그리고 곧장 그 부정을 긍정으로 뒤바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너의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나의 이름. 히나타의 말을 작게 되뇌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여럿 떠올렸다. 소년, 도련님, 태양, 장남, 여름, 술래잡기.

그리고,

 

“쇼요.”

 

나와 함께 가자.

언제까지나 나의 이름으로 널 부를게.